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펠로폰네소스 동맹 (문단 편집) ===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의 큰 변화와 자멸 === 이후 10여 년간의 일시적인 평화기를 거쳐 기원전 431년, [[코린트]]와 코르키아의 분쟁에 대한 양쪽 동맹도시들의 개입 시작으로, 본격적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하였다. 30년 가까이 치러진 어 전쟁에서 보여준 스파르타의 모습은 대중의 상식과는 다르다. 스파르타와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초반에는 웃기게도 페르시아의 경보병 전술을 익힌 아테네에게 육상전에서 여러번 패배한다. 페르시아와 같은 경보병 전술은 잘 쓰기만 한다면 그리스의 중장보병 홉라이트에게도 유용한 것이었다. 아테네는 이오니아 지역에서 그리스 도시들을 해방하면서 페르시아의 경보병 전술과 싸우며, 그들의 본토에서 장단점을 익혔다. [* 애초에 페르시아 군대가 그리스 전사들에게 지속적으로 패배한 이유는, 페르시아 군대의 경보병 전술이 쓸모가 없는 방식이라서가 아닌 수뇌부의 전략적 오판과 고질적인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 때문이었다.)] 아테네는 그리스 군대의 장단점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페르시아 본토에서 싸우면서 익숙해진 하층민들을 활용하는 경보병 전술을 베껴서 사용하자, 스파르타 최정예 귀족 중장보병들은 아테네 경보병들의 기동 사격전술에 우르르 무너지고 사로잡혔다. 이렇게 육상전에서 스파르타의 허약한 모습은 현대인들에게도 당대인들에게도 당황스러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페르시아 전쟁 이후, 실제로는 그다지 강력한 국가가 아니었다. 이렇게 스파르타가 약해진 원인은 그리스의 주요전술이었던 [[팔랑크스]]가 개개인의 전투능력보다는 그냥 물량빨로 상대를 짓밟아버리는 전투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즉, 스파르타는 그리스에서 대규모 병력징집이 적었던 페르시아 전쟁 이전의 시대에는 최강의 육군이 맞았지만, 페르시아 전쟁이후 대부분의 그리스 국가들이 스파르타의 방식으로 대규모 군대를 갖추면서 스파르타는 불과 몇십년만에 인구수를 빼면 그냥 귀족 전사 중심의 낡은 군대라고 볼 수 있었다. 반대로, 아테네는 국제적으로 침략 전쟁을 진출하면서 경제력의 상승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 본토에서 여러번 싸워보면서 숙련된 병사와 장교급 시민들도 많았고, 기존의 스파르타가 여전히 '귀족 및 전사계급' 육성 전략에 만족하고 있을 동안, 해양제국으로 거듭난 델로스 동맹과 아테네 시민들은 약간 더 진화된 싸움방식과 무장시민 이외의 '하층민 계급과 경보병'을 이용하는 상식이 잠깐이지만 실제로 이루어졌다. 그에 비해서, 스파르타는 페르시아 전쟁 이전까지이 명성과는 달리, 육상전에서 이러한 최신 전술과 더 많은 머릿수의 차이에도 무너질 정도로 '그냥 고전적이고 낡은 군대'였을뿐, 이 전쟁 초반의 스파르타는 더 선진적인 군사 계급이 발전하고 인구수도 많은 아테네의 육군에게 자주 깨지면서 그들의 민첩한 전투력을 배워올 수 밖에 없는 상태였다. 오히려, 재밌게도 스파르타는 이 전쟁에서 바다 위에서 아테네를 엿먹이면서 반격의 실마리를 잡았다. 물론, 전쟁 초반에는 스파르타는 가난한 내륙국가에 불과했고, 아테네의 강성했던 해군력 때문에 전략적으로 수세적인 국면에 몰렸다. 하지만, 전쟁 중기 이후에는 아테네가 너무 오만해지면서, 전쟁 초반의 스파르타가 그랬던 것처럼 외교적으로 오만하고 초보적인 실책을 반복하게 된다. 이렇데 아테네가 제국주의 분위기를 즐기며 동맹을 파탄 내는 동안, 스파르타는 오히려 귀족 군인들이 자존심을 버리면서 하층민 같은 경보병들을 대우해주고, 귀족들도 하층민처럼 가벼운 무장으로 무기를 개편하고, 페르시아와 손을 잡고 해군력을 기르면서 기존의 폐쇄적인 외교 전략을 정반대로 바꾸는 개혁을 단행했다. 결과적으로는, 육상전투에서도 그다지 확실하게 이기지 못한 스파르타였지만, 제국주의 국가가 되어버린 아테네의 유아독존식 패권에 대한 델로스 동맹의 도시국가들의 불만이 터져나오면서, 그 기회를 틈타서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동맹과 중립국가들이 오만한 아테네를 배신하도록 유화적인 외교를 펼치면서 스파르타의 해군력으로 그리스 도시들을 복속했다. 즉,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스파르타의 낡은 육군 개념 때문에 육상전에서 승리하기는커녕 인구수가 많은 아테네를 상대할때 힘에 부치면서 싸웠고, 스파르타는 오히려 유화적인 외교 정책 수정 및 해군력 육성을 깨달으면서 승리한 전쟁이었다는 뜻이다. --뭔가 뒤바뀐 것 같지만 이게 실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역사이다. 육지에서 패배하고 바다와 국제외교를 깨달은 스파르타 vs 상업국가인데도 국제외교를 버릴 정도로 오만해진 아테네-- 결과적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스파르타 귀족들이 본인들의 정체성을 버릴 정도로 아테네의 해군 전략을 배우면서, 비슷한 전략을 사용하는 두 국가의 소모전이 되어버렸다. 이렇게되자, 거대제국 [[페르시아]]와의 적대 관계를 유지했던 아테네는 경제적인 자원 수급력에서 스파르타에겨 밀리게 된다. 결국, 적국 페르시아의 지원이 없다는 약점을 지닌 아테네는 기원전 404년 굴욕적으로 스파르타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그리스의 패권을 빼앗아 왔지만, 스파르타 시스템 자체의 한계와 함께 오랜 전쟁이 [[피로스의 승리 | 그리스 전역을 폐허로 만들고 딱히 이득을 보지는 못 하였다]]. 최종적으로는, 이 전쟁은 승리했음에도 군사 국가였던 스파르타 왕정의 붕괴를 불러왔다. 전쟁에서 승리한 스파르타는 아테네처럼 선진적인 세계관의 변화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했음에도, 스파르타의 부실하고 낡은 귀족정의 한계와 그들의 헤게모니는 그리 오래가지는 못 했다. 기원전 395년부터 387년까지 벌어진 코린트 전쟁에서 스파르타는 무식한 국제 외교 때문에 동맹국들이 이탈하고, 페르시아의 지원을 등에 업은 아테네가 복귀하면서 제해권을 잃었다. 또한, 기원전 371년 [[레욱트라 전투]]에서는 전쟁의 피해를 회피하고 무난하게 인구수가 많았던 [[테베]]의 육군이 이미 시대에 뒤처진 스파르타 육군을 상당히 손쉽게 참패시켰다.[* 참고로, 스파르타 육군이 아테네와 테베 육군에게 쳐발린 이유는 단순하다. 그리스 전체에서 '군사 시스템'이 정비된 페르시아 전쟁 이후, 스파르타 육군 같은 훈련은 딱히 다른 도시국가보다 특별한 장점이 아니었다. 페르시아 전쟁으로 다른 도시국가들도 그냥 군인을 많이 뽑는 시스템이 정비되자, 스파르타의 군인 양성 방식은 본인들의 구시대적인 사회 시스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관습에 가까운 상태였고, 경제력과 인구수처럼 '규모'를 다루는 전략적인 의미가 높아진 시대상 앞에서 스파르타 육군은 평범한 군대가 되어 있었다.] 결국,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사실상 이 전쟁이 어떻게 끝나던지, 스파르타의 후진적인 군사 위주의 정치 체제 때문에 스스로 멸망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이후 스파르타가 다시 동맹국을 모으면서 살아나려 했을 때, 바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왕 [[필리포스 2세]]가 그리스 전역을 아예 자신의 왕국, [[마케도니아 왕국]]에 합병시켜 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